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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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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의 기증과 컬렉터19세기 유럽에서의 이야기다. 항상 옷을 차려입어야 하고, 술에 취해서는 들어올 수 없으며, 뛰어다니거나 만지면 안 되고, 조용히, 순례하듯이 보고 행동해야 했던 장소는 어디였을까? 바로 미술관이었다. 몰수한 왕실 소장품과 귀족들의 저택과 교회에서 징발한 미술품, 군사 정복으로 수집한 작품들을 모아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개방한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이 1793년 문을 연 이후 유럽에서는 미술관 설립 붐이 일었다. 미술 작품에는 지혜와 정서적 안정을 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던 당시, 미술관은 시민들을 문명과 문화로 안내해..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2.24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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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정치가는 목소리 내는척, 예술..기후위기를 다룬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재난영화 '투모로우'에 보면 부통령의 마지막 연설 장면이 나온다.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대도시들이 기후변화로 인해 빙하에 뒤덮여 무너져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부통령은 이렇게 독백하듯 말한다. "우리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인류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하지만 오만이었습니다."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2.09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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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본위 화단에 맞서 투쟁...집단화로 권..황금의 복식조 12라운드는 미술계 페미니스트 ‘콜렉티브’의 연대 활동에 관한 것이다. 콜렉티브는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지닌 특정 집단의 자발적 모임을 지칭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저항정신으로 변화와 개혁을 꾀한다는 발족 동기에서 동호인 성격의 일반 그룹 활동과 구별된다. 실로 콜렉티브는 가장 효력 있는 행동주의 기제 중 하나이지만, 법적·제도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해체되기 십상이다. 단명한 까닭에 더욱 강력한 결속력을 갖는 것이 콜렉티브의 속성이기도 하..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2.07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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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 윤두서(1668-1715..버드나무 가지가 휘날리는데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고삐를 잡고 가는 인물과 백마를 그린 '견마도'이다. 말은 수그린 머리를 뒤로 돌렸고 네 발굽도 억지도 따라가는 듯 내키지 않는 모양새다. 선(線) 뿐인데도 말의 형태와 동작, 심사까지 전해진다. 인물의 옷차림이 중국 춘추시대에 준마를 잘 찾기로 유명했다는 구방고(九方皐)나 백락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 빈모려황(牝牡驪黃), 백락일고(伯樂一顧)의 고사를 남겼다. 천리마를 찾아 왕궁으로 끌고 가는 그림인 듯 보인다.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2.06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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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욕망이 드러나는 무대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가 마감됐다. 열댓 명의 미술계 인사들이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 1월 임기 종료를 앞둔 윤범모 관장도 원서를 냈다. 한때 관장 공모 형식은 폐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그다. 미술계의 패거리 의식과 인맥 제일주의를 고질적 병폐로 꼽기도 했던 윤 관장은 정작 2019년 선임될 당시 ‘불공정’ ‘코드 인사’ 논란의 당사자였다.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2.02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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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메타버스는 진짜 혁..어느 분야든 새로운 용어를 만드는 자가 전문가가 된다. 개인적으로 우스운 경험이 있다. 어떤 컨설팅 회의에 참석했는데, 회의 테이블에 있었던 몇몇 사람이 경쟁적으로 영어 약자로 된 경제 용어를 쏟아냈다. 마치 신조어 배틀을 하는 것 같았다. 어려운 단어를 써서 더 전문가처럼 보이기 위해서다.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1.26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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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의 이방인’ 최욱경을 보다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최욱경 전시가 10월 27일부터 열리고 있다. 1980년대에 최욱경과 같은 대학에서 재직한 필자로서는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감개무량했다. 오랜 기간 미국에서 활동하다 1970년대 말 귀국한 최욱경은 대형 화면에 강렬한 채색과 붓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대담한 여류화가’로 알려졌다.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1.26 조회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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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세운상가일제 말, 총독부는 서울이 공습당했을 때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종로3가~퇴계로를 남북으로 잇는 폭 50m 소개(疏開) 도로를 만들었다. 해방 후 이곳에 전쟁 이재민과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정착해 거대한 빈민촌을 이뤘다. ‘종삼’이라 부르는 사창가도 생겨났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수도 한복판이 이래선 안 된다”며 대대적 도심 정비에 나섰다.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1967년부터 5년간 세운상가~진양상가로 이어지는 주상 복합 건물 6동(棟)이 차례로 들어섰다. 세운상가의 시작이었다.작성자 아트허브 작성일 2021.11.20 조회수 0